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한때 온라인에서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인 척한 적이 있습니다. 대단한 범죄는 아니었지만, 소셜 미디어 프로필에 실제보다 훨씬 그럴듯한 저를 올려두었고, 그 가상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에서 묘한 공허함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경험이 있었기에, 타인의 신분을 사고팔다 자신의 존재마저 잃어가는 두 청춘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의 시놉시스가 남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 온라인 신분 세탁, 생각보다 훨씬 정교한 범죄였습니다
영화 속 타쿠야와 마모루가 벌이는 범죄의 구조를 처음 접했을 때, 저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 이른바 소셜 엔지니어링(Social Engineering) 기법을 체계적으로 활용한 고도의 심리 조작 범죄였기 때문입니다. 소셜 엔지니어링이란 기술적 해킹이 아닌, 인간의 심리적 허점과 신뢰 관계를 파고들어 정보나 금전을 탈취하는 수법을 말합니다.
이들의 방식은 이렇습니다. 먼저 여성으로 위장한 가짜 계정을 메신저 플랫폼에 만들고, 고독과 외로움으로 정서적으로 취약해진 남성들에게 집중적으로 접근합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상대방의 내면 결핍은 정밀한 정보 자산이 됩니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이른바 스윙 루트(Swing Route)입니다. 스윙 루트란 온라인에서 쌓아 올린 가짜 감정선을 임계점에서 다른 실제 인물에게 넘겨 그 신뢰를 그대로 이어받는 수법으로, 가짜가 구축한 감정을 진짜가 연기하며 완성하는 구조입니다.
직접 겪어보니 이게 얼마나 무서운 방식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저도 온라인에서 오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상대에게 묘한 친밀감을 느낀 경험이 있는데, 그 감정이 처음부터 계산된 것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습니다. 국내 경찰청 사이버수사국에 따르면, 온라인을 통한 로맨스 스캠 및 신분 사기 관련 피해 신고는 매년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감정을 팔고, 호적을 팔고, 결국 자신을 팔다
영화가 단순한 사기극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신분 세탁(Identity Laundering)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신분 세탁이란 타인의 호적이나 개인정보를 이용해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내거나 기존 인물인 척 활동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타쿠야는 자신의 신분증 대신 새로운 이름이 적힌 위조 신분증을 건네받는 장면에서, 이미 그가 법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유독 마음에 걸렸던 건, 이들이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고 가족을 지키겠다는 지극히 평범한 이유로 조직에 발을 들였고, 그 선택이 얼마나 잔인한 결말로 이어지는지를 스스로는 미처 몰랐습니다. 저 역시 과거에 온라인 속 가짜 자아를 꾸며냈던 이유가 현실의 결핍을 감추고 싶었던 것이었으니, 그 심리적 출발점만큼은 타쿠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영화는 조직의 윗선인 사토가 타쿠야의 장기를 노리는 대목에서 가장 충격적인 국면을 맞이합니다. 호적을 파는 것에서 시작해 신체 자체가 거래 대상이 되는 이 흐름은, 타인의 정체성을 상품화하는 행위가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마저 상품으로 전락시킨다는 논리를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것입니다. 이 영화에서 이 사람만 할 수 있는 판단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 순간 화면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서늘한 기시감이었습니다.

세 남자의 다중 시점이 만들어내는 서사적 경험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다중 서술자(Multiple Narrator) 구조에 있습니다. 다중 서술자 구조란 동일한 사건을 여러 인물의 시점에서 교차 서술함으로써 각 인물의 진실과 거짓이 중첩되어 관객이 직접 판단하도록 유도하는 서사 기법입니다. 마모루, 타쿠야, 그리고 멘토인 카지타니라는 세 남자의 시선이 정교하게 교차하면서 같은 장면이 완전히 다른 의미로 읽힙니다.
솔직히 이 구성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범인을 쫓는 추격극이 아니라,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인물의 도덕성이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마모루의 시선에서 타쿠야는 혼자 도망치려 한 배신자처럼 보이지만, 타쿠야의 시선에서 그 행동은 마모루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서사 구조는 관객에게 단순한 감정 이입을 넘어서 윤리적 불편함을 직접 체험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영화 서사에서 이 같은 구조는 라쇼몬 효과(Rashomon Effect)로 설명되기도 합니다. 라쇼몬 효과란 동일한 사건에 대해 목격자나 관련자마다 전혀 다른 진술을 내놓는 현상으로, 객관적 진실보다 각자의 주관적 인식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영화는 이 구조를 통해 "당신은 지금 누구의 시선으로 타인을 판단하고 있습니까"라고 조용히 묻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OTT 플랫폼에서 소비되는 범죄 스릴러 장르의 비중은 최근 3년간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심리적 반전과 다중 서사 구조를 가진 작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게 나타났습니다.
전반부의 세련됨을 후반부가 스스로 허문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지점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후반부의 서사적 과잉을 말하겠습니다. 초반부 영화가 가진 진짜 강점은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통한 감정 조작과 정체성 도용이라는 보이지 않는 범죄의 서늘함이었습니다. 메신저 너머로 영혼을 흔드는 지능형 사기의 촘촘한 묘사, 그리고 서류 한 장이 인간의 실존을 대체하는 메커니즘은 날카롭고 섬세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장기 적출이라는 고어(Gore) 클리셰를 끌어들이는 순간, 그 세련된 긴장감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고어란 신체 훼손이나 유혈을 자극적으로 묘사하는 장르 관습을 말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서사의 필연적 결과라기보다 충격 효과를 위한 무리한 장치처럼 다가왔습니다. 초반부가 심리극에 가까웠다면, 후반부는 갑자기 B급 액션 스릴러로 방향을 틀어버린 느낌이었습니다.
이 영화가 스스로에게 던진 가장 묵직한 질문, 즉 "정체성은 사고팔릴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어디까지 나로 남을 수 있는가"는 분명 가치 있는 화두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이 후반부의 추격전과 유혈극 속에 묻혀버리면서 영화는 스스로의 주제 의식을 온전히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영화의 핵심 메시지가 피날레에서 오히려 가장 작게 들렸다는 것,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아이러니였습니다.
영화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는 불완전하지만 분명히 볼 가치가 있는 작품입니다. 전반부가 제시하는 신분 사칭과 정체성 상실의 서사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경고입니다. 이 영화를 본 뒤 한 가지만 생각해보시길 권합니다. 온라인 속 나와 현실의 나 사이 간극이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그리고 그 간극이 결국 누구를 갉아먹고 있는지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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