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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 영화 아수라 리뷰 (가족의 위선, 블랙코미디, 고레에다 히로카즈)

by 무비체커 2026. 6. 24.

가족 모임 자리에서 오랫동안 존경하던 어른의 비밀이 한순간에 폭로된 적이 있습니다. 저도 직접 겪어봤는데, 그 순간의 당혹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누구보다 화목했던 집안이 한 꺼풀 벗겨지자 불신과 원망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979년 일본 한 가족의 민낯을 블랙코미디로 풀어낸 영화 <아수라>은, 바로 그 기억을 고스란히 건드렸습니다.

아수라, 아버지의 외도, 그리고 네 자매의 위태로운 연대

1979년 겨울, 평범해 보이던 한 가족의 근간을 뒤흔드는 비밀이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넷째 키코, 첫째 타키코, 둘째 마키코, 셋째 츠나코까지 개성 강한 네 자매는 우연한 계기로 아버지가 젊은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어린아이까지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평생을 헌신해 온 어머니가 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집안 전체가 무너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자매들은 어머니 몰래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비밀리에 머리를 맞댑니다.

그런데 제가 이 전개를 보면서 느낀 건, 그 조심스럽고 눈치 보는 분위기가 너무 낯익다는 것이었습니다. 저 역시 친척 모임에서 어른들의 치부가 드러나던 날,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던 그 어색한 침묵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기에 더 솔직하지 못하고, 가족이기에 더 잔인하게 서로를 흔드는 역설, 이 영화는 그 감각을 정확하게 짚어냅니다.

자매들의 연대는 그러나 처음부터 삐걱거립니다. 영화에서 중요한 서사 장치로 작동하는 것이 바로 내러티브 아이러니(Narrative Irony)입니다. 여기서 내러티브 아이러니란, 등장인물이 자신의 행동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관객만이 그 모순을 바라보게 되는 서사 기법을 말합니다. 아버지를 비판하는 자매들 각자가 이미 저마다의 불륜과 일탈 속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사실을 관객은 알지만, 그들은 끝까지 자신의 위선을 직시하지 않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졌습니다. 웃음이 나오는데 왠지 씁쓸한, 그 묘한 감정이 블랙코미디의 진수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바람피우는 현장이 담긴 신문 기사가 집으로 배달되고, 부모님마저 그 신문을 구독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수습이 한창인 사이,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쓰러졌다는 연락이 옵니다. 넷째 키코가 새 생명을 잉태했다는 기쁜 소식도 잠시, 어머니는 결국 손주의 얼굴을 마주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합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실감하는 순간에도 아버지의 외도가 남긴 잔해를 수습하는 것은 온전히 자식들의 몫이었습니다.

이 작품이 다루는 가족 서사의 구조는 영화학에서 앙상블 캐릭터 드라마(Ensemble Character Drama)로 분류됩니다. 앙상블 캐릭터 드라마란, 단일 주인공 중심이 아니라 복수의 인물이 동등한 비중으로 서사를 끌어가는 형식으로, 각 인물의 내면과 관계망이 교차하며 전체 이야기를 완성하는 방식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 형식을 즐겨 택하는 이유는, 가족이라는 공동체가 결코 한 사람의 이야기로 환원될 수 없다는 그의 일관된 시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핵심 서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아버지의 외도 폭로와 자매들의 비밀 연대 시도
  •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가족 해체의 가속화
  • 아버지를 용서하려던 순간 또 다른 외도가 드러나는 반전
  • 비판자였던 자매들 각자가 동일한 불륜의 궤적을 밟아가는 아이러니

    블랙코미디로 해부한 인간 위선의 민낯

더 가막힌 사실은 아버지의 외도를 비판하던 네 자매 역시, 저마다 불륜과 일탈의 늪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입니다. 첫째 타키코는 자매들을 단속하는 척하면서 유부남 거장과의 부적절한 관계에 깊이 빠져들고, 셋째 츠나코는 남편을 챔피언으로 만들겠다는 집념 이면에서 이중적인 삶을 삽니다. 둘째 마키코는 남편의 바람기를 의심하며 지독한 의처증에 시달리면서도 다른 남자의 유혹 앞에서 흔들리고, 막내 키코는 학교 선생님이라는 남자의 감미로운 말에 사로잡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를 성토하는 이야기가 될 줄 알았는데, 영화는 훨씬 더 넓고 잔인한 방향으로 카메라를 돌려놓았습니다. 모든 인물이 타인의 불륜에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면서도 자신의 일탈에는 끝없이 관대한 모습, 그 이중성을 보고 있노라면 분노보다 먼저 헛웃음이 나오고 맙니다.

이 작품은 개봉 당시 "불륜에 지나치게 관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이 비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르게 읽혀야 한다고 봅니다. 감독의 의도는 불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절대 저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결국 똑같은 궤적을 밟아가는 인간의 본성을 조롱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블랙코미디(Black Comedy)의 핵심 문법입니다. 블랙코미디란 도덕적으로 불편하거나 금기시되는 소재를 유머와 풍자의 언어로 해체함으로써, 관객이 웃음과 불편함을 동시에 경험하게 만드는 장르를 말합니다.

일본 영화계에서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는 오랫동안 사회 비판의 유력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습니다. 실제로 일본 문화청이 발표한 영화 산업 보고서에 따르면, 가족과 공동체의 갈등을 다룬 드라마 장르는 일본 국내 관객층에서 꾸준히 높은 공감 지수를 기록해 왔습니다. 이 영화가 리메이크 작품임에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직접 선택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원작이 가진 인간 관찰의 깊이가 보편적이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연출 방식, 즉 미장센(Mise-en-scène)의 힘도 이 작품을 단순한 막장 드라마와 구분 짓는 요소입니다. 미장센이란 화면 안에 배치되는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우의 동선, 조명, 소품, 배경을 의도적으로 설계하여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 연출의 핵심 개념입니다. 이 영화에서 마켓 구석의 복숭아 통조림 하나, 신문 구독이라는 사소한 일상의 소품들이 서사의 결정적 폭탄으로 작동하는 방식은, 담담한 미장센으로 인간의 민낯을 끄집어내는 감독의 내공을 잘 보여줍니다. 베테랑 배우들의 생활 밀착형 연기가 그 미장센을 뒷받침하면서, 자칫 불쾌하게 느껴질 수 있는 장면들을 웃음과 서글픔이 공존하는 순간으로 바꾸어 냅니다.

한국영화진흥위원회가 정리한 해외 우수 영화 분석 자료에서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작품들은 가족 해체와 공동체의 위선을 주제로 한 예술영화군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될 만큼 작가주의적 완성도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위선적인 굴레를 블랙코미디라는 장르로 해부한 <아수라>는, 불쾌함과 유쾌함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걷는 묘한 작품입니다. 막장 같은 이야기인데 웃음이 나오고, 웃고 나면 왠지 모르게 씁쓸해지는 그 감각이 오래 남습니다. 가족의 비밀이 폭로되던 날의 기억이 있다면, 혹은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지 냉소적으로 바라본 적이 있다면, 이 영화는 분명 무언가를 건드릴 것입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보면 그 깊이가 배가될 것입니다.


참고: https://youtu.be/Ypk6qBFvU6s?si=q6bLhvifktT3yHG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