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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 영화 언제 또 너와 리뷰 (회고록, 가족 오해, 역사적 시선)

by 무비체커 2026. 8. 28.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뜻대로 풀리지 않는 시절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 연이은 실패 앞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를 버티게 해준 건 결국 곁에서 묵묵히 손 잡아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영화 《언제 또 너와》는 바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한 부부의 처절한 생존기가 손자의 시선을 통해 회고록으로 펼쳐지며, 오랜 세월 묵혀온 가족 간의 오해를 조용히 풀어내는 작품입니다.

언제 또 너와, 외할머니의 노트북이 열어준 시간: 회고록이라는 장치

가벼운 뇌경색으로 병원에 입원한 외할머니 토모코. 혼자 할머니 집에 들른 손자 오사무는 켜져 있는 노트북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써 내려간 회고록을 읽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회고록(回顧錄)이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시간 순서대로 돌아보며 기록한 개인 서사 문서입니다. 단순한 일기와 달리, 삶 전체를 조망하며 타인에게 전달할 목적을 가진 글이라는 점에서 성격이 다릅니다. 이 회고록이라는 장치가 영화 전체의 서사 구조를 지탱합니다.

저도 이 도입부에서 꽤 오래 멈췄습니다.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있었나 싶어서였습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그분들이 무엇을 견뎌냈는지 저는 거의 알지 못했다는 걸 그 장면을 보며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오사무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과거는 1940년 여름, 중국 난징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어색한 분위기 속 맞선 자리에서 만난 고로와 토모코. 취미로 난징의 풍경을 그리던 고로는 수줍게 "언젠가 이 풍경을 당신에게 직접 보여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토모코는 예상 밖에도 그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기로 결심합니다. 이 장면의 잔잔한 온도가 이후 이어지는 시련들을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정서적 근거가 됩니다.

패전 후 빈털터리: 꺾인 자존심과 반복되는 실패

타카스기 선배의 회사에 취직해 상하이에서 가정을 꾸린 두 사람은 소소한 행복을 쌓아가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모든 것이 무너집니다. 여기서 패전(敗戰) 이후 해외에서 귀환한 일본인들을 '히키아게샤(引き揚げ者)'라 부릅니다. 쉽게 말해 해외에서 일구어온 삶의 기반을 모두 버리고 빈손으로 본국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귀환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고로 가족이 바로 이 처지였습니다.

돌아온 고국에서도 반겨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장인은 "약아빠지지 못해 빈털터리가 됐다"는 말로 고로의 아픈 곳을 정확히 건드립니다. 어릴 적 집안에 장티푸스가 퍼져 마을 전체로 병이 번지자, 고로의 아버지는 조상들의 무덤 앞에서 할복으로 책임을 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장인의 비난은 그 트라우마를 고스란히 건드렸고, 제가 이 장면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사람을 가장 아프게 하는 말은 늘 가장 가까운 데서 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어릴 적부터 불공평함 속에서 자랐던 고로는 대학마저 그만두고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을 만큼 세상을 향한 한이 깊었던 인물입니다. 토모코는 그런 남편을 차마 볼 수 없어 친정을 떠나 우리끼리 살자고 제안합니다. 1년을 억척같이 일해 모은 돈으로 중고 트럭을 사지만, 고물 트럭은 길 위에서 야영을 해야 할 만큼 자주 고장이 났습니다. 그 길에서 고로가 내뱉은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나중에 일이 풀리면 다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소박하다 못해 서글픈 꿈이었습니다.

이후 고로 가족이 겪은 실패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이바라키현 코이세촌에서 시작한 운송업 → 고물 트럭 고장으로 좌절
  • 타카스기가 보낸 우무(우뭇가사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시작한 토코로텐 가게 → 손님 감소와 취객 난동으로 폐업
  • 타일 영업 재개 → 전후 궁핍한 시절, 사치품 취급을 받아 사업 부진
  • 츠루마루 석유 재취직 후 태풍으로 유조소 붕괴 → 다시 일자리 상실

이렇게 나열해 보면 고로의 삶이 얼마나 집요하게 무너졌는지가 더 선명하게 보입니다. 실패가 반복될수록 어쩌면 이건 운이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들꽃 하나에 담긴 순애보: 화해와 사랑의 언어

그럼에도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만드는 힘은 두 사람 사이의 결속에 있습니다. 어느 날 아들 노보르가 동네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빼앗기고 들어오자, 고로는 자신의 어릴 적 기억이 겹쳐지며 폭발합니다. 토모코가 말리자 고로의 오랜 억울함이 한꺼번에 터지고 맙니다. 이 장면은 제가 직접 보면서 좀 당황했습니다. 남편의 울분이라기보다 오래 쌓인 아이의 울음처럼 들렸기 때문입니다.

토모코는 남편의 상처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눈물로 사과합니다. 그 진심 어린 화해 이후, 고로는 토모코에게 들꽃을 선물하고, 토모코는 그 꽃을 노트 사이에 말려 평생 보관합니다.

여기서 말린 꽃 보존법, 즉 압화(押花) 기법을 활용한 이 행위는 단순한 소품이 아닙니다. 압화란 꽃이나 식물을 눌러 건조시켜 형태와 색을 오랫동안 보존하는 방식입니다. 토모코가 고로의 들꽃을 압화로 보관했다는 것은, 그 순간의 감정 자체를 시간이 지나도 손상되지 않는 형태로 간직하려 했다는 상징으로 읽힙니다. 저는 이 장치가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 중 하나입니다.

결국 고로는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타카스기가 친정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지만, 토모코는 고로의 마지막 편지를 가슴에 품고 홀로 아이들을 키우기로 다짐합니다.

역사적 시선의 공백: 영화가 말하지 않은 것들

이 영화를 두고 "가슴 뭉클한 가족 드라마"라고 평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그 감동에 완전히 동의하면서도 한 가지를 짚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940년 난징과 상하이라는 배경이 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소비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난징과 상하이는 당시 일제 침략의 중심부에 있던 도시입니다. 1937년 발생한 난징대학살(南京大虐殺)은 수십만 명의 중국 민간인이 희생된 역사적 참극으로, 국제 역사학계에서 광범위하게 기록된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영화는 난징을 오직 두 주인공의 로맨틱한 첫 만남의 배경으로, 상하이를 소소한 행복을 쌓아가던 타향살이의 공간으로만 그립니다.

역사적 맥락화(Contextualization)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사건이나 삶을 그 시대의 정치·사회적 구조 속에서 해석하는 접근법입니다. 이 영화는 바로 그 역사적 맥락화가 부재합니다. 고로 가족이 패전 후 겪은 고난은 전쟁이라는 구조적 비극의 산물임에도, 영화는 이를 개인에게 찾아온 가혹한 운명처럼 포장합니다. 가해 국가의 민중이 전쟁을 어떻게 성찰할 것인가 하는 질문은 화면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이 영화는 역사 고발 영화가 아니라 가족 드라마"라고 반론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시각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다만 일본 내 전후 세대의 역사 인식과 관련해, 2023년 NHK 방송문화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40대 이하 일본인의 절반 이상이 제2차 세계대전의 아시아 침략사에 대한 구체적 지식이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영화가 그 공백을 메우기보다 오히려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다는 우려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상처를 이해하며 건넨 들꽃 한 송이와 그것을 평생 말려 보관한 마음, 그리고 말로 다 하지 못했던 진심을 회고록으로 남긴 어머니의 선택은 충분히 울림이 있습니다. 회고록이 마미의 오랜 원망을 풀어내는 장면에서 저도 제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그때의 선택이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저도 한참 뒤에야 이해했으니까요.

영화 《언제 또 너와》는 역사적 시선의 한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부모의 진심이라는 주제에서만큼은 단단한 무게를 가집니다. 이 영화를 보신다면 감동과 함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해서도 한번쯤 독립적으로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감동이 한층 입체적으로 느껴질 것입니다.


참고: https://youtu.be/ntp67p3N2po?si=szSw5oE19yrh_Ke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