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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 영화 용의자 X의 헌신 리뷰 (알리바이 트릭, 생명 경시, 도덕적 딜레마)

by 무비체커 2026. 6. 26.

학창 시절, 수학 문제를 풀 때만큼은 세상이 단순해지는 느낌이 좋았습니다. 공식만 제대로 따라가면 반드시 하나의 정답에 닿는다는 그 명료함이요.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용의자 X의 헌신을 처음 봤을 때, 이 작품이 단순한 추리물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습니다.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 가장 감정적인 이유로 저지른 완벽한 범죄 설계. 그리고 그 설계가 품고 있는 윤리적 균열. 두 가지가 동시에 마음을 눌러왔습니다.

용의자 X의 헌신, 이시가미가 설계한 알리바이 트릭, 수학 천재의 방정식

혹시 추리 소설을 읽다가 "아, 이 트릭은 내가 절대 못 맞추겠다"는 생각이 든 적 있으신가요? 저는 이 작품에서 처음으로 그런 감각을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수학 교사 이시가미 테츠야는 옆집 도시락 가게 사장인 야스코가 전남편과의 격렬한 충돌 끝에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방음이 안 되는 벽 너머로 알게 됩니다. 그는 곧장 찾아가 범죄 은폐를 제안하고, 자신의 천재적인 수학 능력을 이 한 가지 목적에 쏟아붓습니다.

경찰이 추정한 사망일은 12월 2일이었고, 야스코 모녀에게는 그날 극장 티켓과 라면 가게·노래방 직원들의 증언이라는 빈틈없는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탐정 갈릴레오라는 별명을 가진 물리학자 유카와 마나부 교수가 사건에 개입하면서 이 알리바이 구조의 이면을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알리바이(Alibi)란 범죄 발생 시각에 용의자가 현장에 없었음을 증명하는 법적 방어 수단입니다. 이시가미의 트릭은 이 개념 자체를 역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진실은 이렇습니다. 야스코 모녀의 알리바이가 완벽했던 이유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실제 전남편이 살해된 날은 12월 1일이었습니다. 이시가미는 노숙자에게 돈을 쥐어주고 피해자의 숙박업소에서 하루 묵게 해 새로운 지문과 모발을 남겼고, 그 노숙자를 12월 2일 밤에 살해한 뒤 얼굴을 뭉개고 지문을 태워 야스코의 전남편으로 위장했습니다. 이른바 시체 바꿔치기라는 두 번째 살인을 통해 경찰의 시선을 완전히 엉뚱한 날짜와 피해자에게 고정시킨 것입니다.

유카와는 이 구조를 "함정 문제"라고 표현합니다. 고정관념을 깨야 풀 수 있는 문제, 즉 메타 인지(Meta-cognition) 전략이 요구되는 방식입니다. 메타 인지란 자신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사고하고 있는지 스스로 인식하고 조정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경찰이 "이 시체가 야스코 전남편이다"라는 전제를 의심하지 못한 순간, 이시가미의 방정식은 완성됐습니다.

이 트릭이 주는 서사적 쾌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야스코 모녀는 12월 2일에 대해 단 한 마디의 거짓말도 하지 않았다
  • 경찰이 추적한 피해자는 처음부터 야스코의 전남편이 아니었다
  • 이시가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문제의 출제자이자 동시에 유일한 해설자였다

    생명 경시와 숭고함 사이, 이 작품이 건드리지 않은 윤리적 균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제가 며칠을 불편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이시가미의 헌신이 눈물겨웠기 때문이 아니라, 그 눈물의 방향이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시가미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완성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의 핵심은,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연고 없는 노숙자를 유인해 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화는 이시가미의 고독한 내면과 유카와와의 두뇌 대결에 집중하느라, 이름도 없이 소비된 노숙자의 생명 가치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합니다. 저는 솔직히 이 부분이 내내 걸렸습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이시가미의 감정에 몰입하도록 유도하는 동안, 그 감정의 토대에 무고한 타인의 죽음이 깔려 있다는 사실이 자꾸 눈에 들어왔거든요.

심리학에서는 이런 서사 구조를 도덕적 면허 효과(Moral Licensing Effect)와 연결해 분석하기도 합니다. 도덕적 면허 효과란 과거의 선한 행동이나 숭고한 동기가 이후의 비윤리적 행동을 심리적으로 정당화하는 현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명분이 두 번째 살인의 무게를 희석시키는 방식이 바로 이 구조입니다.

또 하나 짚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야스코가 이시가미의 집요한 감시와 통제 속에서 두려움을 느끼다가, 그가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눈물로 그를 동정하는 결말은 전형적인 트라우마 결속(Trauma Bonding) 패턴에 가깝습니다. 트라우마 결속이란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강렬한 감정적 경험을 통해 심리적으로 연결되는 현상으로, 스톡홀름 증후군과 유사한 맥락에서 논의됩니다. 이를 낭만적인 순정으로 포장하는 것은 현실에서 유사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잘못된 감정 프레임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미디어가 특정 범죄나 폭력을 어떻게 묘사하느냐가 대중의 인식에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 바 있습니다. 미디어 심리학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범죄자의 동기를 감정적으로 미화하는 서사는 폭력 행위에 대한 사회적 허용 임계값을 낮출 수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이 가진 탐미주의적 성취는 분명하지만, 바로 그 탐미주의가 윤리적 성찰을 가린 지점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도덕적 딜레마가 남기는 것, 엔딩이 갈리는 이유

결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엔딩이 더 '옳은가'를 두고 저도 한참 생각했거든요.

유카와를 통해 이시가미의 진실을 전해 들은 야스코는 극심한 죄책감에 휩싸이고, 이시가미가 검찰로 송치되던 날 유치장을 찾아와 자수합니다. "우리만 행복해질 수 없다"는 한마디와 함께요. 이로 인해 이시가미가 평생을 갈아 넣어 완성한 구원의 설계는 한순간에 무너지고, 그는 짐승처럼 절규합니다. 이 장면에서 배우 츠츠미 신이치의 연기는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처음 봤을 때 잠시 숨을 참았던 기억이 납니다.

반면 류승범이 주연을 맡은 한국판 리메이크에서는 이요원이 연기한 야스코 역할의 인물이 결국 자수하지 않는 엔딩으로 마무리됩니다. 원작보다 덜 비참하다고 할 수 있지만, 저는 오히려 그 선택이 또 다른 불편함을 남긴다고 느꼈습니다. 자수하지 않음으로써 노숙자 살인과 이시가미의 파멸 위에 세워진 일상을 그냥 살아가게 되는 것이니까요.

국내외 학술 연구에서도 문학과 영화 속 도덕적 딜레마가 관객의 윤리적 판단 능력을 어떻게 자극하거나 둔화시키는지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이 3개국에서 리메이크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딜레마가 단지 일본적 정서가 아니라 인간 보편의 감각에 닿아 있다는 증거라고 봅니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잊을 만하면 다시 보게 되는 작품입니다. 다만 저는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이시가미의 절규에 감정을 빼앗기기 전에, 그 절규의 토대가 무엇 위에 세워졌는지를 한 번쯤 질문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트릭의 정교함에 탄성을 보내되, 그 정교함이 가린 것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걸작을 제대로 소화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습니다. 원작 소설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영화와 다른 결 하나를 더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참고: https://youtu.be/gYsV3zlucWg?si=hyCydUIPyd47Fom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