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난 사람이 주변 사람들에게 가장 오래 기억되는 건 언제일까요. 저는 2013년 작 〈요노스케 이야기〉를 보고 나서 한동안 이 질문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규슈 나가사키에서 도쿄로 홀로 상경한 청년의 이야기인데, 영화가 끝난 뒤에도 그가 가슴 한구석에 오래 남아 있었습니다.
요노스케 이야기, 1980년대 도쿄, 버블 경제가 만들어낸 청춘의 풍경
혹시 '버블 경제(Bubble Economy)'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십니까. 화려한 네온사인, 넘쳐흐르는 소비, 거품처럼 부풀어 오른 자산 가격. 버블 경제란 실물 가치를 훨씬 뛰어넘는 자산 가격 상승이 일정 기간 지속되다가 한순간에 붕괴되는 경제 현상을 말합니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은 전후 최대의 경제 호황기를 누리던 시절이었고, 이 영화는 바로 그 시절의 도쿄를 배경으로 합니다.
1987년, 글리코의 키스민트 껌 신제품 홍보 행사 장면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시대 배경이 딱 고정됩니다. 실제로 키스민트 껌은 1987년에 출시된 제품으로, 영화는 이런 소품 하나로 시대 고증을 자연스럽게 처리합니다. 당시 일본의 자산 가격 지수는 1980년 대비 약 3배 이상 급등했으며, 이 시기 도쿄의 1인당 소비 지출도 빠르게 증가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바라본 부분은 바로 이 시대적 맥락입니다. 고급 수영장을 갤러리처럼 이용하는 부유층 자녀들, 화려하게 세련되어 가는 식문화와 패션, 그 속에서도 선풍기와 냉매에 의지하며 알바비를 모아 친구에게 기꺼이 건네는 요노스케의 대비가 단순한 캐릭터 설정이 아니라 그 시대의 계층적 단면을 보여주는 장치처럼 읽혔습니다.
요노스케를 둘러싼 주요 등장인물과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쿠라모치: 입학식에서 옆자리 인연으로 만난 친구. 후에 유이와 함께 혼전 임신으로 학업을 중단하게 됩니다.
- 유이(쇼코의 사촌): 화려한 사교 모임을 꿈꾸며 요노스케 주변을 맴돌다 결국 라디오 DJ로 성장합니다.
- 쇼코: 재벌가의 영애로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지만 요노스케의 엉뚱한 매력에 진심으로 끌립니다.
- 옆집 사진작가: 요노스케에게 카메라를 건네며 그의 시선이 세상을 향하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무해함이라는 캐릭터, 그 빛과 그늘
요노스케라는 인물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처음에는 그냥 "착하고 엉뚱한 청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저는 좀 다른 감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영화 서사에서 자주 쓰이는 개념 중에 '포일 캐릭터(Foil Character)'라는 것이 있습니다. 포일 캐릭터란 주인공과 대비되는 성격이나 가치관을 가진 인물로, 주인공의 특성을 더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요노스케 주변의 인물들, 이용하려 드는 선배나 화려함을 갈망하는 유이가 사실상 이 역할을 합니다. 그들이 계산적일수록 요노스케의 무해함은 더 빛납니다.
스무 살 무렵, 저도 요노스케 같은 친구가 한 명 있었습니다. 세련된 말솜씨도, 거창한 야망도 없었지만, 그 친구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멋있어 보이려 애쓰던 시절에 그 친구만은 계산 없이 진심을 다했고, 어색한 순간마저 천연덕스럽게 채워 넣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연락이 끊겼지만, 지금도 삶이 각박하게 느껴질 때면 그 친구의 웃음이 떠오릅니다. 그 친구가 있었기에 제 스무 살이 조금 더 부드러웠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 영화의 요노스케가 가진 '무해함'은 현실의 청춘과는 꽤 거리가 있습니다. 질투, 이기심, 자기보호 본능. 스무 살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 감정들이 요노스케에게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이 점은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동시에 다소 이상화된 인물상이라는 인상도 줍니다. 현실의 스무 살이 겪는 열등감과 상처를 지나치게 걷어낸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수현과 세키네 시로, 실화가 담긴 추모의 의미
이 영화가 단순한 청춘 성장 드라마에 머물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는 점입니다.
2001년 1월, 도쿄 신오쿠보역에서 선로에 추락한 취객을 구하려다 두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 님과 일본인 사진작가 세키네 시로 님이었습니다. 미나미신주쿠(南新宿)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고는 당시 한일 양국에 큰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안겼습니다. 특히 이수현 님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미담이 과도하게 부풀려지는 것을 우려해 간곡히 자제를 요청했다고 전해지며, 그 덕분에 두 분에 대한 공식 기록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원작 소설은 이 사건에서 출발하여, 그분들이 어떤 청춘을 살았을지를 상상하며 써 내려간 이야기입니다. 영화화한 오키타 슈이치 감독도 실화를 재현하는 대신 그 품성을 짐작하는 방식으로 접근했습니다. 이수현 님이 재학했던 일본어학교 측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밝고 성실한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제가 이 대목에서 한 번 멈칫했습니다. 요노스케의 죽음을 라디오 뉴스로 처음 전하는 장면이 유이이고, 그 뉴스를 들으며 각자의 일상 속에서 고인을 떠올리는 구성이 꽤 영리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현실의 비극을 청춘 영화의 감동적 피날레로 소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편함이 잠깐 스치기도 했습니다. 영화가 아름다운 건 분명하지만, 실화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호불호는 분명히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에서 미장센(Mise-en-scène)의 역할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미장센이란 프레임 안에 배치된 모든 시각적 요소, 즉 배경, 조명, 소품, 인물의 위치 등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영화적 기법을 말합니다. 요노스케가 카메라 뚜껑을 처음 여는 장면, 눈보라 속 첫 키스 장면, 빛바랜 필름 사진들이 쏟아지는 마지막 장면이 모두 이 미장센의 힘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16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그렇게까지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이 시각적 풍요로움 덕분입니다.
요노스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수십 년 뒤 각자의 일상에서 문득 그를 떠올리며 웃는 장면은, 사실 제가 이 글의 첫 질문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가장 오래 기억되는 사람은 거창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게 이 영화가 조용히 건네는 질문입니다.
〈요노스케 이야기〉는 완벽한 영화가 아닙니다. 서사적 긴장감이 느슨하고, 주인공이 지나치게 이상화된 면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울리는 이유는, 우리가 각자의 청춘 속에 품고 있는 어떤 얼굴을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스무 살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다면, 그 이름을 한 번쯤 조용히 불러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보는 이유는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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