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감정, 살면서 한 번쯤 절실하게 품어본 적 있지 않으십니까. 저는 낯선 직장에서 완전히 겉돌던 시절, 제 존재가 그냥 공기처럼 느껴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 감각이 떠올라 찾아보게 된 영화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소외된 청년의 이야기를 아파트 미스터리와 스파이 스릴러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그 사람이 사라졌다, 택배기사 마르코, 그리고 수상한 아파트
어두운 밤, 인적 드문 아파트에서 주민들이 하나둘 자취를 감춘다는 소문이 돕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마르코는 스물 언저리의 청년으로,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 여파로 일하던 식당에서 해고된 뒤 택배 기사로 새 출발을 합니다. 여기서 팬데믹이란 세계보건기구(WHO)가 선언하는 전 지구적 감염병 대유행 상태를 가리키며, 2020년대 초 수많은 자영업자와 서비스직 종사자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배달에 임했지만, 감사 인사 대신 돌아온 것은 연달아 쏟아지는 고객 클레임이었습니다. 실제로 코로나19 이후 국내 택배 물량이 폭증하면서 배달 종사자들의 감정 노동 강도 역시 크게 높아졌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겪어보니, 아무리 열심히 해도 노력이 상대에게 가닿지 않는다는 느낌만큼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도 없더군요. 마르코가 그 감각 속에서도 버티는 장면들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걸렸습니다.
지친 일상 속 마르코의 유일한 위안은 선배 아라카와의 소설을 읽어주는 일과 알고리즘이 이끌어다 준 낯선 소설이었습니다. 몰입도가 남다른 그 소설의 작가 '최수설'에게 생애 처음으로 응원 댓글을 달아보는 장면은, 온라인 공간에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조용히 연결되는 순간의 온도를 담백하게 포착합니다.
도청 장치와 사라진 205호 주민
며칠 뒤, 205호 배송 물품의 수령인 이름에서 마르코는 자신이 응원하던 작가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살짝 방 안을 확인해보니 그 설마가 맞았습니다. 기묘한 우연에 가슴이 두근거릴 새도 없이, 아파트에는 이상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합니다. 205호 앞에 정체불명의 남자가 어슬렁거리고, 300호 내부에는 수많은 도청 장치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도청 장치(listening device)란 상대방 몰래 음성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설치하는 소형 전자 장비를 가리킵니다. 이런 장비가 평범한 아파트에 등장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 영화가 장르를 서서히 확장하고 있다는 신호였습니다. 저는 이 지점까지는 영화가 꽤 영리하다고 느꼈습니다. 일상적인 공간에 비일상적인 긴장감을 심어두는 방식이 자연스러웠거든요.
그런데 며칠째 205호 작가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302호 남자가 피범벅이 된 채 담배를 물고 서 있는 장면이 나오면서 스릴의 농도가 급격히 높아집니다. 매번 분리수거장 앞에 있던 아줌마마저 자취를 감추고, 의심스러운 남자를 뒤쫓던 마르코는 그가 302호가 아닌 205호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합니다. 이 연속된 미스터리는 초중반부 서사의 가장 탄탄한 구간이었습니다.
이 장면들에서 주목할 만한 서사 기법은 페이소스(pathos)의 활용입니다. 페이소스란 인물이 처한 비참하거나 안타까운 상황이 관객의 감정적 공명을 이끌어내는 극적 장치를 말합니다. 마르코가 위험을 감지하면서도 작가를 걱정해 움직이는 행동들은, 그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라 감정적으로 이미 연결된 인물임을 보여줍니다.
비밀 요원과 반전 — 그리고 장르 인플레이션의 함정
자, 여기서부터 사건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205호의 작가 '스도'는 사실 아파트 테러리스트의 연락망을 추적하라는 비밀 임무를 받은 요원이었습니다. 그녀는 소설가 지망생으로 위장 입주했고, 파트너 요원은 302호에 자리를 잡아 주민들의 행동 패턴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습니다. 마르코가 배달했던 의문의 상자들은 요원들의 최신 작전 무기였고, 피범벅 장면이나 도청기 설치 소동은 모두 작전 중 빚어진 해프닝이었습니다.
진범은 200호 안경남이었습니다. 그는 분리수거를 가장해 테러 관련 부품과 도면을 쓰레기에 숨겨 공범에게 전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직히 이 반전은 예상 밖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납득이 잘 안 됐습니다. 이 트릭이 성립하려면 앞서 쌓아올린 복선들이 훨씬 더 정교해야 하는데, 막상 되짚어보면 빈 구멍들이 꽤 눈에 띄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 바로 여기입니다. 영화 서사론에서는 장르 혼합 전략을 '장르 하이브리드(genre hybrid)'라 부릅니다. 장르 하이브리드란 서로 다른 장르의 관습을 결합해 새로운 서사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기법입니다. 이 영화는 그 시도 자체는 참신했지만, 아파트 미스터리 코미디로 시작된 이야기가 국가적 테러 공작이라는 스케일로 갑자기 도약하면서 개연성이 무너집니다. 일상적 공간에서 빚어지는 소소한 오해와 긴장이 매력이었는데, 후반부에 스파이 작전이 전면에 나서는 순간 그 온도가 다 흩어져버렸습니다.
이 영화가 가진 서사적 문제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초반 아파트 미스터리의 현실적 설정과 후반 국가 요원 스파이물 사이의 톤 낙차가 너무 큼
- 200호 안경남의 테러 공모 방식이 지나치게 작위적으로 느껴짐
- 마르코와 작가 치하루 사이의 감정적 유대가 댓글 몇 개라는 얕은 설정에만 의존해 설득력이 부족함
- 마르코의 희생을 관객에게 강요하듯 설계된 신파적 결말 구조
마르코의 마지막과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의 의미
사건이 마무리되는 지점에서 관객이 마주하는 것은 가슴을 치는 진실입니다. 작가 치하루가 소설을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마르코가 남긴 응원 댓글들이었습니다. 그녀는 그 댓글들을 파일로 모아두었고, 그 파일은 목숨보다 소중한 물건이 되어 있었습니다. 마르코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단지 그 사실을 스스로 몰랐을 뿐이었습니다.
이 결말이 전하는 메시지 자체는 분명히 울림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에서 카타르시스(catharsis)보다 석연찮음을 더 강하게 느꼈습니다. 카타르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한 개념으로, 비극을 통해 관객이 감정적 정화와 해방을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르코의 희생이 이 정화를 의도했다면, 두 사람의 감정적 연결이 훨씬 더 두텁게 쌓여야 했습니다. 댓글 파일 하나로 죽음을 정당화하기에는, 마르코라는 인물이 받아 마땅한 몫보다 너무 가벼운 서사적 무게가 얹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난 뒤 제 경험상 오래 남은 건 이 물음이었습니다.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몰래 힘이 되어주고 있지는 않을까, 혹은 누군가의 댓글 하나가 나를 이렇게 지탱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감각 말입니다.
<그 사람이 사라졌다>는 참신한 출발과 인상적인 메시지를 가진 작품이지만, 장르의 과도한 짬뽕과 신파적 결말이라는 한계를 완전히 넘지는 못했습니다. 완성도 높은 스릴러를 기대하고 보면 실망할 수 있고, 소외된 청년의 감성 영화로 보면 중반부가 산으로 흐른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다만 "당신은 이미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 하나만큼은 어떤 비판도 지우지 못하는 온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소한 감동을 원하는 분이라면, 장르적 완성도에 큰 기대를 걸지 말고 가볍게 감상해보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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