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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일본 영화 어느 가족 리뷰 (혈연주의, 선악 모호성, 가짜 가족)

by 무비체커 2026. 8. 20.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가장 깊은 상처를 받아본 적 있으신가요? 저는 혈연으로 묶인 관계가 오히려 더 잔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몸으로 배웠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느 가족〉은 바로 그 서늘한 진실을 정면으로 건드리는 영화입니다. 2018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이 작품은, 제도와 혈통이라는 허울을 걷어냈을 때 남는 진짜 온기가 무엇인지를 조용하고도 묵직하게 묻습니다.

어느 가족, 혈연주의의 균열, 이 영화가 불편한 이유

혈연주의(血緣主義)란 피를 나눈 관계를 가족의 전제 조건으로 보는 사회적 통념입니다. 쉽게 말해 "낳았으니 가족이다"라는 믿음이 그 핵심입니다. 〈어느 가족〉은 이 믿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면으로 뒤흔듭니다.

영화 속 친부모들은 아이를 방치하고 학대합니다. 유리는 한겨울 베란다에서 추위에 떨고 있었고, 온몸에 학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두 달이 넘도록 딸이 실종된 사실을 숨긴 부모가 법적으로는 '진짜 가족'입니다. 반면, 일용직 노동자 오사무와 그의 아내 노부요는 아무런 법적 권리도 없이 이 아이를 거둡니다. 노부요는 어린 시절 학대의 상흔이 팔에 남아 있습니다. 그녀가 유리에게 유달리 따뜻한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장면을 실제로 목도한 적이 있습니다. 피로 묶인 가족보다 아무 이해관계 없는 타인이 더 진심 어린 온기를 내어주는 순간이 분명히 존재했고, 그게 오히려 더 구원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족의 다양한 형태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이미 학술적으로도 깊이 다뤄지고 있습니다. 국내 1인 가구 비율이 2023년 기준 34.5%를 넘어섰고, 비혼·비혈연 공동체 가구도 꾸준히 늘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단순한 인구 통계가 아니라, '가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힙니다.

선악 모호성이라는 불편한 화두

이 영화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선악 모호성, 즉 어떤 행위가 법적으로는 범죄지만 인간적으로는 이해 가능한 지점에 놓이는 그 불편한 경계입니다. 여기서 선악 모호성이란 하나의 행동을 두고 법률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이 충돌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오사무와 쇼타는 마트에서 물건을 훔칩니다. 노부요는 사망한 할머니를 집 마당에 암매장합니다. 법의 잣대로는 명백한 범죄입니다. 그런데 그 동기를 들여다보면 어떻습니까. 오사무가 쇼타를 발견한 장소는 차 안이었습니다. 부모에게 버려진 아이였습니다. 암매장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배경에는 연금 수입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극빈 상황이 있었습니다. 법 앞에서 이들은 범죄자이지만, 삶의 맥락 앞에서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솔직히 이 부분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제가 그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질문이 쉽게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회철학에서 말하는 규범 윤리학(Normative Ethics)의 핵심 질문, 즉 "무엇이 옳은 행동인가"라는 물음이 이 영화에서는 결코 깔끔한 답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규범 윤리학이란 인간의 행동에 대한 도덕적 기준을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학문 분야입니다.

영화 속 인물들이 마주한 상황을 구조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빈곤 구조: 일용직 수입 + 세탁소 반일 근무 + 월 6만 엔 연금이 여섯 식구의 전부
  • 아동 방임: 유리의 실종을 두 달 넘게 숨긴 친부모, 어린이집의 신고로 세상에 알려짐
  • 법적 공백: 혈연이 아닌 구성원들은 어떤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함

이 구조를 보면 이들의 범죄는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 안전망의 구멍에서 자란 비극처럼 보입니다.

가짜 가족이 건넨 진짜 온기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생각한 장면은 바다로 여행을 떠나는 장면입니다. 아무 말 없이 파도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에는 진짜 행복이 있었습니다. 법적으로는 남남이고, 각자의 사연으로 얽힌 가짜 가족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어떤 정상 가족보다 더 따뜻해 보였습니다.

이타적 연대(Altruistic Solidarity)라는 개념이 여기서 살아 숨 쉽니다. 이타적 연대란 자신의 이익보다 타인의 안녕을 우선하며 함께 버티는 관계 방식을 뜻합니다. 쇼타는 유리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미끼가 되어 다리를 다칩니다. 노부요는 오사무에게 형벌이 가중될 것을 우려해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씁니다. 오사무는 자신의 진짜 이름을 쇼타에게 붙여주며, 마지막에 그 아이를 진짜 부모에게 돌려보내기 위해 스스로 '아빠 노릇'을 내려놓습니다.

노부요가 "엄마라고 불린 적이 없다"며 흘리는 눈물은, 제가 영화관을 나서면서도 한참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법이 인정하지 않은 모성이 법이 인정한 가정보다 더 실질적이었던 이 역설이, 이 영화의 가장 진한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학적으로 이 관계는 선택 가족(Chosen Family)이라고 불립니다. 선택 가족이란 혈연이나 혼인이 아닌, 자발적 선택과 상호 돌봄으로 형성되는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미국 심리학회(APA)의 연구에 따르면, 선택 가족 공동체는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된 개인들의 심리적 안녕과 회복탄력성에 혈연 가족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보호 효과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영화의 빈틈, 그럼에도 남는 여운

저는 이 영화를 무조건 칭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두 가지 지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첫째는 아동 범죄 낭만화의 문제입니다. 오사무가 쇼타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는 장면은 영화의 따뜻한 톤 덕분에 일종의 유대감 형성 과정처럼 연출됩니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는 어린아이의 가치관과 미래를 망치는 명백한 아동 착취에 가깝습니다. 영화가 이 죄악을 충분히 직시하지 않고 감성적인 서사 뒤로 살짝 숨겨버린 것 같아 아쉬웠습니다.

둘째는 후반부 서사의 급격한 수렴입니다. 전반부의 느릿하고 세밀한 일상 묘사와 달리, 경찰에 붙잡힌 이후 전개는 지나치게 빠르게 정리됩니다. 각 인물이 품고 있던 복잡한 욕망과 죄책감이 제대로 탐구되기 전에, 이미 정해진 감동의 결론을 향해 수렴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구조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인물의 깊이를 희생시키는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장면에서 쇼타가 버스 창밖으로 나지막이 "아빠"라고 중얼거리는 그 한 마디는, 오사무가 듣지 못했기에 더욱 진하게 울렸습니다. 들리지 않는 곳에서 비로소 전달되는 감정, 그게 이 영화가 건네는 가장 진실된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가족〉은 결국 가족의 정의를 새로 쓰라는 영화가 아닙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긴 기준들, 즉 혈연, 법적 인정, 사회적 정상성이라는 잣대를 가만히 내려놓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영화입니다. 가장 비참한 순간에 옆에 있어준 사람이 진짜 가족이라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면, 이 영화는 그 답을 더 깊이 확인하게 해줄 것입니다.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혼자 조용히 볼 것을 권합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도 한참 일어나기 싫어질 테니까요.


참고: https://youtu.be/dc8x9wX2-bI?si=3O4ZABlJKz8xivHM